2026년, K반도체 ‘기적의 해’가 되려면 [이재철칼럼]
매일경제-경제 · 2026-08-25 08:45
· #반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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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황 넘실대는 2026년에 묻는다
정부는 순풍인가, 사이렌 노레인가
물리학자들은 1905년을 ‘기적의 해’로 부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기적’이라는 단어가 붙을까.
스위스 특허청에서 일하던 한 청년이 현대물리학의 토대가 될 논문 4편을 한 해에 쏟아냈다. ‘E=mc2’로 유명한 질량·에너지 등가성, 특수상대성이론, 광전효과, 브라운운동에 관한 논문까지.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남성이 떠오른다면 맞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기념비적인 일이 한 해에 집중된 맥락에서 기자는 ‘1983년’을 한국 경제에 기적의 해로 꼽고 싶다. 오늘날 국부를 살찌우는 메모리 반도체가 싹을 틔운 시점이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이 2월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이른바 ‘도쿄 구상’이다. 단지 우연일까. SK하이닉스의 뿌리인 현대전자산업도 같은 달 출범했다. 12월에는 삼성전자가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당신의 책장에 크리스 밀러의 저서 ‘칩워’가 있다면 246쪽을 보시라. 64K D램에 대한 비화가 있다.
이병철 회장은 당시 스타트업이었던 마이크론에 관련 설계 기술을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마이크론은 설계에서 생산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때라 자금이 급했다.
마이크론 창업자 워드 파킨슨은 이때 받은 라이선스료가 “상당한 도움”이 됐다고 회고한다. 아이다호주의 신생 기업을 찾아가 D램 자주화의 발판으로 쓴 삼성의 지략이 놀랍다. 64K D램은 30년 뒤 국가등록문화유산(제563호)으로 지정된다.
마이크론 얘기가 나왔으니, 미국 메모리 산업에서 ‘기적의 해’는 언제일까. 엔화 가치를 절상한 ‘플라자 합의’로 일본산 메모리 가격 경쟁력이 약화한 1985년을 꼽을 수 있겠다.
정부 개입이 아닌, 기업가정신의 관점에서 기자에게는 1980년의 울림이 크다. ‘미국의 감자왕’으로 불린 사업가 존 리처드 심플롯이 마이크론에 투자한 해다.
아이다호에서 감자 사업을 일군 그는 맥도날드에 냉동 감자를 공급하며 갑부의 반열에 올랐다. 칠순을 앞둔 그에게 고향 청년들이 반도체 회사를 차렸다며 투자를 요청했고, 그 패기에 매료돼 거액의 수표를 써 줬다. 거대 마이크론 공장의 씨앗이 감자라니.
땅에서 번 돈이 실리콘 웨이퍼 위에 새 국부를 쌓기까지 이렇듯 미국과 한국에는 도약의 안내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위험 감수가 반세기 뒤 후대를 먹여 살리고 있다.
시선을 2026년의 한국으로 돌린다. 애플의 팀 쿡이 “100년 만의 홍수”라 부를 만큼 메모리 가격이 치솟았다. 그 과실이 K반도체에 고인 2026년을 제2의 ‘기적의 해’로 부를 수 있을까.
선뜻 마음이 가지 않는다. 분기 실적마다 전대미문의 숫자가 춤추지만, 가슴을 때리는 감동은 없다. 수요와 공급 불균형이 가져온 호황에 기적이라는 귀한 말을 붙일 수 없다.
정부 역할에도 기대와 걱정이 교차한다. 서남권 반도체 프로젝트에선 지혜로운 조력자를 넘어 조급함이 묻어난다. 과거 정부의 투자·일자리 압박에 균형발전 테마가 더해진 것은 아닌지. 연구개발 현장의 유연근로를 두고는 부처 장관들이 옥신각신한다. 이러다 배가 산으로 가는 건 아닌지.
영화 ‘오디세이’에서 사이렌이 등장하는 대목은 짧지만 강렬하다. 오디세우스(맷 데이먼 분)는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으면서도, 자신은 귀를 열어둔 채 온몸을 돛대에 묶는다. 유혹 속에서 심연을 바라보고 위기를 경계하는 결기가 가득하다.
바라건대 K반도체가 후대에 지침이 될 신화의 면모를 닮았으면 한다. 2026년이 1983년을 잇는 ‘기적의 해’로 기억될지 알 수 없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호황에 취하지 않고 몸을 돛대에 묶어 새 항로를 찾는 기업가들의 결기가 서야 가능한 일이다.
남는 질문. 이 신화에서 정부는 배를 미는 순풍인가, 사이렌의 노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