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게임의 도전...20년 사용한 엔진은 기술부채, 새 엔진은 경쟁력
[인포스탁데일리=김세원 기자] 국내 게임 개발 환경이 언리얼 엔진과 유니티 등 글로벌 상용 엔진 중심으로 재편된 가운데, 한동안 설 자리가 좁아졌던 국산 자체 게임 엔진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과거 자체 엔진을 활용했던 국내 주요 게임사 상당수는 후속작을 개발하거나 장기 서비스 중인 게임의 개발 환경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상용 엔진을 선택했다. 이미 구축된 기술과 개발도구를 활용할 수 있고 관련 개발 인력도 상대적으로 폭넓게 확보할 수 있어서다.
모든 게임사가 이와 같은 길을 택한 것은 아니다. 펄어비스는 MMORPG '검은사막'부터 이어온 자체 엔진 개발 기조를 차세대 '블랙스페이스 엔진'까지 이어가며 AAA급 오픈월드 MMORPG 대작 '붉은사막'을 선보였다.
언리얼 등 상용 게임 엔진의 한계를 보완하는 개발 툴을 만들며 에픽게임즈, 네이버 등과 제휴한 국내 IT 스타트업 버추얼플로우 역시 최근 대규모언어모델(LLM) 기반의 새로운 자체 게임 엔진 개발에 나섰다.
한쪽에서는 오랜 기간 쌓인 자체 엔진을 기술부채로 판단해 교체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투입하면서까지 새로운 자체 엔진을 만드는 셈이다.
게임사가 직접 엔진을 개발하는 것이 더 이상 일반적이지 않은 시대, 그럼에도 K-게임 개발사들이 '자체 엔진' 개발의 명맥을 이어가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 자체 엔진 쓰던 K-게임, 왜 상용 엔진으로 넘어갔나
국내 게임업계가 처음부터 언리얼·유니티와 같은 글로벌 상용 엔진 중심으로 성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프로젝트 특성에 맞춘 자체 엔진을 직접 구축하는 시도가 결코 적지 않았다.
먼저 넥슨의 장수 PC MMORPG '마비노기'는 2004년 출시 당시 자체 개발 엔진 '플레이오네'를 적용했다. 2005년 서비스를 시작한 PC MMORPG '던전앤파이터' 역시 2D 도트 그래픽 기반 액션을 구현하기 위해 다이렉트X 기반의 자체 2D 횡스크롤 엔진을 사용했다.
2004년 서비스를 시작한 '크레이지레이싱 카트라이더' 역시 넥슨의 자체 개발 엔진을 기반으로 제작됐다.
하지만 후속 프로젝트에서는 달랐다. 넥슨은 현재 마비노기의 플레이오네 엔진을 언리얼 엔진으로 교체하는 '마비노기 이터니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후속작 '마비노기 영웅전'과 '마비노기 모바일' 역시 상용 엔진으로 개발했다.
던전앤파이터 역시 후속작 '던전앤파이터 모바일'과 AAA급 콘솔·PC 게임 '퍼스트 버서커: 카잔'에는 각각 유니티와 언리얼 엔진이 적용됐다. 카트라이더 IP 후속작 역시 자체 엔진이 아닌 상용 엔진을 기반으로 제작됐다.
이처럼 과거 자체 엔진을 활용하던 국내 게임사들이 글로벌 범용 엔진으로 이동한 배경에는 단순한 그래픽 기술 이상의 변화가 있다.
엔씨에서 오랫동안 게임 엔진과 MMORPG 개발을 경험한 노순보 버추얼플로우 대표는 자체 엔진에서 상용 엔진 중심으로 개발 환경이 바뀌는 과정을 직접 경험한 개발자다.
노 대표는 엔씨 입사 이전 IMC게임즈에서 자체 엔진 기반 MMORPG를 개발했으며, 엔씨에서도 자체 엔진 기반 프로젝트 '리니지 이터널' 등을 거쳐 이후 언리얼 엔진 기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노 대표는 "과거 1세대나 1.5세대, 2세대 개발팀의 경우 프로그래머들이 키를 잡고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며, "업계가 계속 커지고 기획, 아트 등 팀내 직군도 다양해지다 보니 좀 더 정규화된 파이프라인을 원하는 니즈가 같이 겹쳤고, 콘텐츠를 빠르게 구현하고 검증할 수 있는 개발 환경의 중요성도 함께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업계의 변화는 개발자들의 경력과 인력 활용에도 영향을 미쳤다. 종래 회사마다 다른 자체 엔진을 사용하는 환경에서는 한 회사에서 익힌 제작 툴이나 기법을 다른 회사에서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웠다. 자칫 이직 시도가 '경력 단절'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엔진 자체를 개발하는 프로그래머보다 이를 콘텐츠 제작 도구로 사용하는 아티스트와 기획자에게 이러한 위험이 더 컸다.
노 대표 역시 "A회사에서 열심히 자체 엔진으로 만들었는데 B회사로 옮기면 툴을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했다"고 회상했다.
넥슨 관계자 역시 "일반적으로 3D 개발의 경우 언리얼 엔진을 활용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며 "개발자들 역시 프로젝트마다 엔진을 새롭게 익히기보다 커리어 초기에 익힌 엔진 계열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진단했다.
즉, 상용 게임 엔진이 단순히 프로젝트에 그래픽과 물리 기능을 제공하는 개발도구를 넘어 개발자들이 경험과 기술을 축적하고 회사와 프로젝트 사이에서 이동할 수 있는 하나의 공통 개발 생태계로 자리 잡은 셈이다.
◆ 모두 떠난 건 아니다…자체 엔진 고집한 펄어비스
그렇다고 국내 게임업계가 자체 엔진을 일방적으로 포기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기업이 펄어비스다. 대표작 '검은사막' PC·콘솔부터 '검은사막 모바일'까지 자체 개발 엔진을 활용한 펄어비스는 이후 기존 엔진을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작에 필요한 기술적 목표에 맞춰 차세대 자체 엔진까지 별도로 개발했다. 바로 스팀에 출시한 AAA급 오픈월드 RPG '붉은사막'에 적용된 '블랙스페이스 엔진'이다.
펄어비스 측 관계자는 "자체 엔진은 게임의 방향성과 개발 과정에 맞춰 필요한 기술을 구현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며 "새로운 게임을 만들기 위해 요구되는 기술적 목표가 달라 이에 맞춰 엔진도 함께 발전시켜 개발했고, 블랙스페이스 엔진이 '붉은사막'의 광활한 오픈월드와 여러 환경을 구현하는 기반이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 펄어비스의 이러한 자체 엔진 기술은 해외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소개되는 단계까지 확대됐다. 올해 독일 '게임스컴 데브'에 주최 측 초청을 받아 연사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펄어비스는 해당 컨퍼런스에서 "붉은사막의 오픈월드 배경인 파이웰 대륙을 구현한 과정과 자체 엔진 기술을 공유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자체 엔진 개발은 그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개발사에는 오히려 독자적인 기반 기술을 토대로 한 기술자산 구축 과정이 될 수 있다.
버추얼플로우 노순보 대표 역시 "자체 엔진 개발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굉장히 많은 자본과 기술이 들어가는 작업"이라며 "자체 엔진을 가진 팀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 때 일반적이지 않은 콘텐츠도 쉽게,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있다는 의미"라며 이를 회사의 기술적 가치 측면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범용 상용 엔진이 다양한 프로젝트에 필요한 기능을 안정적으로 제공한다면, 자체 엔진은 특정 개발사가 만들고자 하는 게임의 방향에 맞춰 엔진 수준부터 필요한 기술을 직접 구현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엔진 자체의 외부 판매 여부와 별개로 이를 지속적으로 고도화하고 실제 게임 개발에 활용할 수 있다면 자체 엔진이 게임사의 생산기술이자 개발 역량을 보여주는 또 다른 평가자산이 될 여지도 있는 셈이다.
한편, 펄어비스는 블랙스페이스 엔진을 외부에 별도로 판매할 계획은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 같은 자체 엔진인데…'기술부채'와 '경쟁력' 가른 것은
다만 자체 엔진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곧 그 기술 경쟁력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프로젝트에 너무 최적화해 구축한 엔진도 장기간 라이브 서비스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최초 설계 당시 예상하지 못했던 콘텐츠와 시스템이 계속 추가되면 오히려 개발을 제약하는 기술부채로 변할 수 있다.
버추얼플로우 노순보 대표는 "콘텐츠 개발의 요구와 엔진 코어의 안정성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기술부채가 발생한다"며 "콘텐츠의 니즈를 계속 들어주다 보면 코어가 계속 흔들리게 된다. 그걸 제대로 수정하지 않은 상태로 계속 붙여 나가는 것이 곧 기술부채"라고 말했다.
특히 MMORPG처럼 수년에서 수십 년 동안 서비스를 이어가는 게임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더욱 두드러질 수 있다.
게임을 개발하면서 기존에 없던 기능에 대한 요구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이를 빠르게 구현하기 위해 엔진 코어를 충분히 재설계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능을 계속 덧붙이면 구조가 점차 복잡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나마 기존 엔진을 이해하던 개발자가 조직을 떠난 이후에 속출할 수 있다.
노 대표 역시 "예전부터 알던 분들이 계속 계시면 사람의 힘으로 메우는데, 그 사람들이 빠져버리면 완전한 레거시 코드가 되어 결국 처치 곤란이 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넥슨의 PC MMORPG '마비노기' 역시 자체 엔진이 장기간 서비스 과정에서 직면할 수 있는 문제를 보여주는 사례다.
마비노기 개발팀은 "플레이오네 엔진을 유지하면서 크게 ▲그래픽 표현력 ▲자체 엔진에 따른 생산성 ▲리소스·데이터 구조 등 세 가지 측면에서 기술적 한계를 체감했다"며, "우선 플레이오네 엔진이 개발 당시 기술 수준에 맞춰 고정된 렌더링 파이프라인 위에서 설계돼 최신 셰이더 기반 표현 기법을 동일한 수준으로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밝혔다.
특히 "플레이오네 엔진이 그간 게임 내에서 문제로 지적된 관절 애니메이션의 부자연스러움과 의상·헤어의 물리 표현, 정적인 카메라 연출, 사실적인 빛 반응 표현의 어려움, 글로우·윤곽선 렌더링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능 저하 등을 해결하는 데 한계가 됐다"며, "플레이오네의 콘텐츠 제작 툴이 언리얼 엔진이 현재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기능과 비교해 제공 범위와 생산성에 차이가 있었고, 코드나 에셋 단위로 개발자가 직접 처리해야만 겨우 작업이 가능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장장 20년에 디르는 라이브 서비스 기간 동안 장기에 걸쳐 누적된 리소스와 데이터 구조도 문제가 됐다.
마비노기 최초 개발 당시 정해진 자체 규약을 기반으로 리소스와 데이터가 구성된 데다 스크립트 의존도가 높아, 콘텐츠와 시스템을 업데이트할 때마다 기존 코드와 데이터, 스크립트 위에 새로운 사양이 계속 덧붙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개발팀은 "결국 전체 로직을 파악하고 유지보수하는 데 드는 비용이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며 "이러한 한계들은 부분적인 개선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판단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마비노기 이터니티' 프로젝트를 통한 엔진 전환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 됐다"고 밝혔다.
이처럼 넥슨은 기존 자체 엔진을 보완하는 대신 언리얼 상용 엔진을 기반으로 개발 환경 자체를 다시 구축하는 길을 선택했다.
반면 펄어비스가 택한 방식은 달랐다. 기존 엔진에 새로운 게임의 요구사항을 계속 덧붙이는 대신, 새로운 프로젝트가 요구하는 기술적 목표에 맞춰 엔진 자체를 집요하게 발전시킨 끝에 차세대 블랙스페이스 엔진 구축에 성공했다.
이처럼 자체 엔진이 장기적인 기술자산으로 남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존 코드를 유지하는 것보다 새로운 게임이 요구하는 기술과 개발 환경에 맞춰 코어 자체를 지속적으로 고도화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하다. 그에 따라 같은 자체 엔진 개발력이 '기술자산'과 '기술부채'라는 서로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 상용 엔진 쓴다고 '자체 기술' 사라진것은 아냐
그렇다면 자체 엔진의 유지 비용과 기술부채를 피하기 위해 상용 엔진을 선택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노순보 버추얼플로우 대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언리얼 엔진과 같은 범용 상용 엔진은 다양한 장르와 프로젝트에 활용할 수 있도록 표준화된 기능을 제공하지만, 개별 게임이나 개발팀이 요구하는 모든 제작 방식까지 기본적으로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각 개발사는 상용 엔진을 사용하면서도 자신의 프로젝트 특성에 맞는 별도의 제작 툴과 플러그인, 스크립트 등을 개발해 자체적인 개발환경을 다시 구축한다. 여기서 또 시간, 인력, 예산 등 또 다른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노 대표는 "상용 엔진에는 정규화된 기능들이 다 있지만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또 하나씩 쌓아 올려야 한다"며 "그러면서 팀마다 제각기 다른 개발 룰과 프로세스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버추얼플로우의 창업 역시 엔씨에서 개발자로 재직하면서 목격한 '중복 개발의 비효율'에서 출발했다. 한 개발팀이 필요로 하는 기능을 다른 개발팀 역시 별도로 개발해야 하는 상황과, 팀과 회사를 옮기며 제작 툴이 다르다는 이유로 겪게 되는 일각의 경력 단절 문제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상용 엔진이 확산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게임사의 자체 개발기술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엔진 자체를 처음부터 만들지는 않더라도 실제 게임 제작 시 상용 엔진 위에 각 게임과 개발조직에 필요한 제작도구와 개발 파이프라인을 다시 구축해야 한다.
이에 따라 게임사의 기술 경쟁력을 단순히 자체 엔진 보유 여부만으로 평가하기보다 상용 엔진을 포함한 전체 개발환경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구축하고 유지하는지까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버추얼플로우의 T4Framework 등 자체 개발 툴 역시 이러한 언리얼 상용 엔진 기반의 개발환경을 보완하는 또 다른 시도다.
결국 게임 엔진을 둘러싼 선택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있다.
과거에는 게임사가 원하는 콘텐츠를 구현하기 위해 엔진까지 직접 만들었지만, 개발 규모가 커지면서 업계는 표준화된 상용 엔진으로 이동했다. 이후에는 다시 상용 엔진 위에 프로젝트별 제작 툴과 개발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 자체 기술이 오히려 더 필요해졌다.
자체 엔진이 기술 경쟁력이 될지, 장기간 쌓이는 기술부채가 될지는 엔진을 '직접 만들었느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고도화할 기술과 인력을 갖췄는지, 개발하려는 콘텐츠에 얼마나 적합한 생산환경을 구축했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상용 엔진이 사실상 표준으로 자리 잡은 국내 게임업계에서, 다시 등장한 자체 엔진 개발의 흐름이 어떤 결과를 보여줄지 주목된다.
김세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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