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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슈퍼호황이 연 4만달러 시대…개혁 절박함은 지우고 있다 [여기는 논설실]
1994년 일본의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4만달러를 넘어섰다. 이듬해에는 4만5000달러에 육박했고, 2012년에는 5만달러 문턱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다시 3만달러대 중반이다. 엔화 약세에 따른 달러 환산 효과가 크지만, 장기 저성장과 생산성 정체라는 구조적 문제도 외면할 수 없다. 한때 세계 제조업을 호령하던 일본조차 높은 소득 수준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실패했다.
반면 올해 한국 경제는 화려한 숫자를 쏟아내고 있다. 지난 9월 수출은 1209억달러로 사상 최대였다. 이 중 절반인 603억달러가 반도체였다. 무역흑자는 499억달러에 달했다. 9월까지 누적 수출은 8145억달러로 이미 지난해 연간 실적을 넘어섰다. 사상 첫 연간 수출 1조달러 돌파도 가시권이다. 올해 명목 경제성장률은 12.3%에 달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1인당 GDP 4만달러도 눈앞이다. 일본이 30여 년 전에 도달한 숫자다. 연평균 원·달러 환율이 1450원 안팎에 머문다면 달성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잠재성장률이 0%대로 추락할 것을 걱정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다. 일등 공신은 반도체다. 인공지능(AI) 투자 열풍에 따른 메모리 가격 급등이 수출과 기업이익을 끌어올리고 1인당 GDP 4만달러 진입 가능성까지 키웠다. 문제는 지속 가능성이다. 반도체 성과가 한국 경제 전체의 생산성 혁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4만달러는 한 번 오른다고 해서 저절로 지켜지는 숫자가 아니다. 일본이 1인당 GDP를 4만달러 이상 유지한 최장 기간은 2008~2013년까지 6년에 불과했다. 세계 최고 제조업 강국조차 성장의 동력을 끊임없이 바꾸지 못하면 소득이 하락할 수 있다는 실증 사례다.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는 “반도체 호황이 우리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고 지적했다. 반도체 수출이 급증해도 내수와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저절로 높아지지는 않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생산성 격차가 좁혀지는 것도 아니다. 저출산·고령화와 노동시장 이중구조, 수도권 집중 같은 고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전 총재는 반도체 호황이 10년간 지속될 것이란 낙관론부터 경계했다. 반도체 초과세수를 영구 재원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는 경고다. 반도체 호황이 구조개혁의 절박함을 지울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올해와 내년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웃도는 상황에서 정부가 굳이 재정지출을 늘려 성장률을 더 끌어올릴 이유도 없다.
경제가 어려울 때는 누구나 구조개혁을 외치지만 세수가 늘고 성장률이 높아지면 개혁을 서두를 이유가 약해진다. 정부는 농어민 반발에 부딪히자 13년째 미뤄온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의 연내 가입 신청을 접었다. 반면 162조원 규모의 미래대응기금은 벌써부터 부처별 나눠먹기로 변질될 위험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은 반도체 호황으로 벌어들인 시간과 돈을 구조개혁에 써야 할 때다. 국제기구의 진단도 같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에 경기 회복 이후 재정건전화를 재개하고 연금개혁과 지출 효율화, 중기 재정준칙을 추진할 것을 권고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반도체 수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경기 변동성과 외부 충격에 대한 취약성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수출이 늘어도 건설업과 다른 제조업의 회복이 뒤처지는 불균형 성장의 위험도 경고했다.
반도체 호황은 변화를 추진할 기회로 활용할 때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다. 반면 개혁을 미루는 핑계가 되는 순간 추락의 빌미가 된다. 일본은 구조조정과 금융개혁을 지체한 대가로 장기 정체를 겪었고, 거품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늘어난 세수는 산업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완충하고,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는 재원이 된다. 기업의 투자 여력과 고용 수요가 커진 지금이 재교육과 전직을 지원하기에 유리하다. 호황은 개혁을 불필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의 사회적 비용을 낮춰주는 조건이다. 4만달러는 반도체가 열 수 있지만 5만달러는 개혁 없이는 열리지 않는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
[email protected]
1인당 GDP 4만달러도 눈앞이다. 일본이 30여 년 전에 도달한 숫자다. 연평균 원·달러 환율이 1450원 안팎에 머문다면 달성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잠재성장률이 0%대로 추락할 것을 걱정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다. 일등 공신은 반도체다. 인공지능(AI) 투자 열풍에 따른 메모리 가격 급등이 수출과 기업이익을 끌어올리고 1인당 GDP 4만달러 진입 가능성까지 키웠다. 문제는 지속 가능성이다. 반도체 성과가 한국 경제 전체의 생산성 혁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4만달러는 한 번 오른다고 해서 저절로 지켜지는 숫자가 아니다. 일본이 1인당 GDP를 4만달러 이상 유지한 최장 기간은 2008~2013년까지 6년에 불과했다. 세계 최고 제조업 강국조차 성장의 동력을 끊임없이 바꾸지 못하면 소득이 하락할 수 있다는 실증 사례다.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는 “반도체 호황이 우리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고 지적했다. 반도체 수출이 급증해도 내수와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저절로 높아지지는 않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생산성 격차가 좁혀지는 것도 아니다. 저출산·고령화와 노동시장 이중구조, 수도권 집중 같은 고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전 총재는 반도체 호황이 10년간 지속될 것이란 낙관론부터 경계했다. 반도체 초과세수를 영구 재원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는 경고다. 반도체 호황이 구조개혁의 절박함을 지울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올해와 내년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웃도는 상황에서 정부가 굳이 재정지출을 늘려 성장률을 더 끌어올릴 이유도 없다.
경제가 어려울 때는 누구나 구조개혁을 외치지만 세수가 늘고 성장률이 높아지면 개혁을 서두를 이유가 약해진다. 정부는 농어민 반발에 부딪히자 13년째 미뤄온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의 연내 가입 신청을 접었다. 반면 162조원 규모의 미래대응기금은 벌써부터 부처별 나눠먹기로 변질될 위험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은 반도체 호황으로 벌어들인 시간과 돈을 구조개혁에 써야 할 때다. 국제기구의 진단도 같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에 경기 회복 이후 재정건전화를 재개하고 연금개혁과 지출 효율화, 중기 재정준칙을 추진할 것을 권고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반도체 수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경기 변동성과 외부 충격에 대한 취약성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수출이 늘어도 건설업과 다른 제조업의 회복이 뒤처지는 불균형 성장의 위험도 경고했다.
반도체 호황은 변화를 추진할 기회로 활용할 때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다. 반면 개혁을 미루는 핑계가 되는 순간 추락의 빌미가 된다. 일본은 구조조정과 금융개혁을 지체한 대가로 장기 정체를 겪었고, 거품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늘어난 세수는 산업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완충하고,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는 재원이 된다. 기업의 투자 여력과 고용 수요가 커진 지금이 재교육과 전직을 지원하기에 유리하다. 호황은 개혁을 불필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의 사회적 비용을 낮춰주는 조건이다. 4만달러는 반도체가 열 수 있지만 5만달러는 개혁 없이는 열리지 않는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
[email protected]